부채탕감 정책이 지지를 받으려면
부채탕감 정책이 지지를 받으려면 확실한 도덕적 해이 방지 대책과 함께 갚을 수 없는 ‘죽은 빚’이 늘어나는 것을 예방하는 정책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이재명 정부의 첫 추경예산에 부채탕감 방안이 포함되었습니다. 부채탕감은 뜨거운 감자입니다만, 사회적으로 필요합니다. 회수가능성이 전혀 없는 ‘죽은 빚’으로 간주되는 장기 연체 채무는 탕감을 하는 게 사회적으로 바람직하고, 소상공인의 코로나 빚에 대한 대책도 시급합니다. 특히, 코로나 판데믹 당시 영업 제한 및 금지 조치로 인한 경제적 피해를 재정이 아닌 저금리 대출 지원으로 구제(?)했던 잘못된 정책은 소상공인의 부채 부담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코로나 빚은 정부의 책임인만큼, 정부 재정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부채탕감은 필요하지만, 역기능도 만만치 않아 경제적 충격이 큰 금융위기 상황이 아니면 정부가 주도해서 부채탕감에 나서는 일은 흔치 않습니다. 다른 선진국과는 달리 우리나라에는 공공기관이 운영하는 일상적인 채무조정제도가 있습니다. 게다가 2024년 제정된 개인채무자보호법에는 선진국처럼 금융회사와 채무자 간 자발적인 채무조정, 즉 사적채무조정제도를 활성화하는 방안이 포함되었습니다. 공적 사적 채무조정제도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개선할 점이 많습니다만 개인파산에 가지 않고 채무부담을 줄이는 제도는 점점 확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새 대통령이 들어설 때마다 취임 맞이 정례 행사처럼 부채탕감 방안과 새로운 기구가 만들어집니다. 기존의 공적 사적 채무조정제도가 활성화하지 않는 문제점을 그대로 두고, 5년마다 새로운 부채탕감 정책이 등장하는 것도 이해하기 어려운데, 도덕적 해이 방지 대책은 보이지 않고, 탕감 기준이 점점 느슨해지고 있는 것은 더 큰 문제입니다.
문재인 정부의 100% 부채탕감 대상은 대출 원금 1500만원 이하, 연체 10년 이상의 장기 소액 연체 채무였습니다. 당시에도 성실 상환자 형평성 논란, 도덕적 해이 논란이 있었지만, 사회적 순기능 관점에서 충분히 수용할 수 있는 기준이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금액은 5000만원으로 다섯배 늘었고, 연체 기간은 7년으로 줄었습니다. 안 그래도 부채탕감이 부당하다는 국민적 정서가 강한데 충분한 설명도 없고, 국민을 설득하려는 노력도 보이지 않습니다.
장기 소액 연체의 기준이 그때그때 정부 맘대로 바뀌고, 점점 더 관대해지고 있습니다. 어차피 못 갚는 빚이 계속 늘어나고 있으니 다음 정부에서는 100% 탕감 기준을 7천만원, 1억원으로 상향하고, 연체 기간을 5년으로 단축하지 말라는 법도 없습니다. 어차피 ‘죽은 빚’이라 상관없다고 할지 모르겠으나 선뜻 동의하기가 어렵습니다.
탕감 기준이 느슨해질수록 성실 상환자의 분노는 커지기 마련이고 도덕적 해이를 부르는 유인도 커지는 법입니다. 그러면 부채탕감의 역기능이 순기능을 압도하게 됩니다. 가계 부채는 날로 늘어가고 빚 돌려막기 다중채무자도 급증하고 있어 부채탕감 수요도 늘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수요에 잘 대처해야 합니다. 우선 채무자가 장기연체자로 전락하지 않도록 기존의 공적 사적채무조정제도의 사전 예방 조치를 강화해야 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신용불량자 급증을 막으려면 손쉬운 대출을 규제해야 합니다.
부채탕감이 국민 공감을 얻으려면 갚을 수 없는 죽은 빚이 늘어나는 것을 예방하는 정책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사전 예방 없는 병 주고 약 주는 식의 빚 탕감 정책은 저소득·저신용 서민계층에게 고금리 대출의 개미지옥으로 빠지는 지름길을 터주는 길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