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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제작진 입장문]저널리즘은 ‘단죄’의 대상이 아닙니다.

2020년 02월 26일

저널리즘은 ‘단죄’의 대상이 아닙니다.

지난해 9월11일 ‘KBS 뉴스9’를 통해 ‘김경록 PB 인터뷰’ 보도를 담당했던 제작진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해 뒤숭숭한 이 시기에 이런 입장을 내놓는 것이 송구스럽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가 저희는 물론 우리 언론 전체에도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해 부득이 그동안 꺼내지 않았던 저희의 입장을 밝힙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그제(2/24) 이 보도와 관련해 방송심의규정 제14조 ‘객관성’을 위반했다며 프로그램 관계자 징계를 결정했다는 소식을 듣고 많이 놀랐습니다. 놀란 것도 놀란 것이지만, 수긍이 가지 않았습니다. 거짓과 조작, 허위가 아닌 보도임에도 어떻게 보도 관계자를 징계하라는 결정을 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회의록 전문을 아직 보지 못해 방심위의 이 같은 결정 배경과 이유 전체를 알 수는 없지만, 보도된 내용을 토대로 제작진의 억울한 입장을 밝히고 재심을 요청하고자 합니다.

저널리즘의 원칙은 무엇이고 또 ‘객관성’이라 함은 무엇일까요? ‘내 말이 정답’이라고 할 수 있는 저널리스트나 언론 학자가 있을까요? 그만큼 어려운 개념이지만 저희 제작진은 늘 객관성과 공정함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을 해왔다고 생각합니다.

김경록 씨 인터뷰는 협박에 의한 것도 아니고 보도에 허위의 내용이 들어있지도 않습니다. 인터뷰 설득 과정은 김경록 씨 변호인 사무실에서, 그리고 변호인이 함께 하는 자리에서 이뤄졌습니다. 만일 제작진이 김 씨를 협박했다면 변호인이 먼저 문제를 제기했을 겁니다. 불법 주차 문제로 김 씨를 저희 제작진 차량에 태워 김 씨 승용차가 있는 곳에 내려주었지만, 인터뷰 장소인 여의도 KBS에는 김 씨가 직접 자신의 승용차를 몰고 와 인터뷰에 응했습니다. 아울러 김 씨는 ‘자신이 다니는 회사에 이번 일로 누를 끼치고 마치 회사가 연관된 것 같은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는 취지로 인터뷰에 응한 이유를 말했고 이는 사실상 공개된 저희 인터뷰 전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 사전에 인터뷰 취지를 변호사 앞에서는 물론, 또 김 씨만 따로 있을 때에도 설명했고, 인터뷰 직전 취재 기자의 수첩을 빌려주며 질문 내용을 미리 적도록 했습니다. ‘향후 기소나 자신의 재판에서 불리해질 수 있는 내용은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등의 주의 사항도 고지했습니다.

실제 보도된 내용, 편집에 대한 비판이 있을 수는 있지만 허위의 내용은 전혀 없습니다. 인터뷰 전체를 녹화한 내용 또한 이 문제가 불거지기 전까지 한 달 내내 보도본부의 기자, 제작 지원 인력이라면 누구나 볼 수 있도록 공개된 상태였습니다. 인터뷰 전문 역시 제작진이 스스로 당시 사내 직원들에게 공개했습니다. 이 인터뷰 전문은 여러 경로로 외부에 공개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게 전붑니다.

일부 심의위원께서 ‘선택적 받아쓰기’라며 객관성을 위반한 것이라 지적했다고 들었습니다. 납득하기 어려운 지적입니다. 저희가 검찰의 말을 받아썼습니까? 더구나 현장에서의 저널리즘은 취사와 선택의 연속입니다. 주제·소재·인터뷰이·내용 정리까지 선택은 저널리즘 행위의 처음이자 마지막을 내내 관통합니다. 이 안에 저널리즘의 핵심이 들어있다고 저희는 생각합니다. 취사와 선택의 결과가 맘에 들지 않아 비판할 수는 있어도 ‘처벌하고 단죄’할 수 있는 영역이라 생각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생방송 출연이 아닌데 방송에서, 그것도 시간적 제약이 심한 뉴스에서 어떻게 편집을 하지 않겠습니까? 편집을 위한 내용 선택을 하면서 저희가 가장 중심에 놓은 것은 인터뷰이가 경험한 사실과 주장을 분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른바 ‘거리두기’를 통한 객관성입니다. 인터뷰이가 직접 듣고 본 부분, 즉 사실 관계 부분을 보도의 중심에 놓았고, 앞세웠습니다. 그게 조국 장관의 부인 정경심 교수가 투자 당시 5촌 조카가 펀드 운용자임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고, 그럼에도 이 부분을 조 전 장관은 청문회 과정 내내 숨기거나 부인했다는 것입니다.

김경록 씨는 ‘조국 전 장관의 무관함’을 밝히기 위해 인터뷰에 응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런 주장이 얼마나 얼토당토하지 않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과연 김경록 씨가 펀드 투자와 관련하여 정경심 교수가 받고 있는 여러 범죄 혐의에 조 장관이 연관돼 있는지 혹은 무관한지를 판별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입니까?

저희 인터뷰 전문을 보면 알 수 있지만 김 씨는 조 장관이 민정수석이 되기 전인 대학 교수 시절 식사 자리를 했을 뿐, 민정수석 취임 이후에는 만난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조 장관이 민정수석에 취임한 이후 부인 정경심 교수는 문제의 사모펀드 투자를 시작했습니다. 김 씨의 인터뷰대로라면, 민정수석 임명 이후에는 두 사람이 만난 적조차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모펀드 투자에 조 장관이 개입했는지 안했는지를 김 씨가 판단할 수 있을까요? ‘조 장관은 투자를 잘 모르니 관련이 없다’는 김 씨의 주장은 자신의 위치로 볼 때 적절한 말도 아닐뿐더러 이를 위해 KBS와 인터뷰를 했다는 주장은 김 씨가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합니다.

‘정경심 교수가 당한 것 같다’는 김 씨의 인터뷰 내용도 그렇습니다. 김 씨가 ‘정 교수가 5촌 조카에게 당한 것 같다’는 판단을 저희 인터뷰 과정에서 내놓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저희 제작진은 이 같은 김 씨 판단의 정확성과 객관성을 파악하기 위해 추가 질문들을 던졌습니다. ‘실제 정 교수로부터 이런 얘기(5촌 조카에게 속았다)를 직접 들은 적이 있느냐?’, ‘정 교수가 최근 펀드 투자에 대해 후회를 하더냐?’ 등입니다. 이에 김 씨는 모두 들은 적이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막판까지 고심했지만 저희는 이 부분 역시 김 씨가 근거를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추정과 예단에 불과하다고 판단했고, 최종 기사에서 제외한 것입니다.

아울러 김경록 씨가 방심위에 제출했다는 탄원서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우선 김 씨의 탄원서가 방심위의 결정에 영향을 준 부분에 대해 매우 유감스럽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김경록 씨는 탄원서에서 ‘검찰 질문과 KBS 인터뷰 순서가 일치하는 등 검찰과의 유착이 의심스럽다’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저희 제작진은 인터뷰에 앞서 김 씨의 변호인으로부터, 두어 차례 있었던 김 씨의 검찰 진술 내용을 직접 전해 들었습니다. 이를 토대로 질문을 준비했습니다. 이 때문에 김 씨가 질문 내용과 검찰에서 자신이 말한 내용이 비슷하다고 느낄 수는 있었을지 모릅니다. 김경록 씨에게 부탁드립니다. 자신이 검찰 조사에서 말한 내용을 하루 이틀만에 저희 제작진이 상세히 알고 있는 게 이상하다며 검찰과의 유착을 의심하고 내통을 주장하기 전에 먼저 왜 그런지 자신의 변호인에게 묻기 바랍니다.

또한 ‘검찰 질문과 같은 의심이 들어 인터뷰를 끊었다’는 김 씨 주장 역시 사실과 다릅니다. 실제로는 김 씨 본인의 증거인멸 혐의 부분을 제작진이 질문하자 ‘잠시 쉬었다가…’라며 머뭇거렸고, 이에 제작진이 중단하고 카메라까지 끈 것입니다.

김 씨는 또 ‘KBS와 검찰의 유착’ 근거로 인터뷰 직후 검찰 조사 과정에서 검사가 ‘조국이 김경록 집에 쫓아갔다’는 내용을 종이에 적어 보이며 추궁한 적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김 씨는 “최성해 총장이 조국을 집 앞까지 쫓아갔다”고 저희 제작진에게 말한 적이 있는데 그걸 저희가 ’조 장관이 김경록 씨 집에까지 찾아왔다‘로 잘못 알아듣고 검찰에 전달된 것이라고 의심합니다. 실로 이 부분은 황당하기 그지없습니다. 앞의 얘기든 뒤의 얘기든 저희 제작진 어느 누구도 인터뷰 당일 그런 말을 김 씨로부터 들은 적이 없습니다. 만일 저희 제작진이 ‘조국이 김경록 집에까지 쫓아갔다’라는 말을 오해해서라도 들었다면, 이른바 조 장관이 직접 ‘사건 관계자 회유’에 나섰다는 얘기인데 왜 보도조차 하지 않았을까요? 맹세코 그런 얘기는 당시 없었고, 검찰에 그 비슷한 얘기조차 취재 과정에서 전한 바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김 씨는 비보도를 요청했다는 부분입니다. 인터뷰이가 인터뷰를 끝내놓고 갑자기 방송 직전에 보도하지 말 것을 요청하는 일은 종종 발생합니다. 이 경우 재차 설득하고 고민은 해야 하겠지만 반드시 인터뷰이의 요청에 따르지는 않습니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무엇보다 유감인 것은 방심위가 김 씨의 의견서를 심의 결과에 반영하면서도 사전에 단 한번도 KBS 측이나 제작진에게 사실 관계를 묻거나 의견을 내도록 요청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김 씨의 일방적인 주장을 반영하여 ‘관계자 징계’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는 명백하고 중대한 절차적 하자입니다. 방송법 100조는 ‘방송통신위원회는 제1항 및 제3항에 따라 과징금 처분 또는 제재 조치 명령을 하는 경우 미리 당사자 또는 그 대리인에게 의견을 진술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규정합니다. 김 씨의 의견에 대해 방심위는 KBS에 김 씨의 의견서에 대하여 진술할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이에 저희 제작진은 소명 기회를 다시 받고자 합니다. 재심을 청구할 계획입니다.

방심위는 저희가 ‘객관성 조항’을 어겼다고 판단했습니다. ‘객관성 조항’은 허위나 왜곡 보도를 한 경우에 해당합니다. 불명확한 내용을 사실인 것처럼 방송해서는 안 된다고 적시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불명확한 김 씨의 의견이나 주장이 담긴 부분은 최대한 배제하고 김 씨가 귀로 듣고 눈으로 봤다는 사실 관계만을 중심으로 보도했습니다. 또 보도할 부분에 대해 검찰에 재차 확인했고, 당사자인 정경심 교수 측에도 수차례 물었습니다. 조국 전 장관이나 정경심 교수는 저희 보도에 대해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단 한 차례도 직접 문제를 제기한 적이 없습니다.

방심위원님들께 묻고 싶습니다. 객관성이 무엇입니까? 저널리즘의 원칙은 무엇입니까? 인터뷰 전문을 싣지 못하면 객관성을 위반한 것입니까? 허위도 아니고 없는 걸 조작해서 만든 것도 아닌데 언론의 가장 기본적인 저널리즘 행위인 취사·선택·편집마저 ‘처벌’의 대상으로 삼아야 합니까?

저희는 조국 장관도 검찰도 아닌 시청자의 입장에서 무엇이 중요한 지를 기준으로 삼습니다. 우리 사회의 민주적인 운영을 위한 정보가 무엇인지를 고민하면서 사실과 주장(의견)을 분리해 판단했습니다. 검찰개혁도 중요하지만 고위 공직자의 윤리와 도덕성도 시청자에게 중요합니다. 이것이 저희에게는 불편부당성이고 객관성이고 저널리즘 원칙이었습니다. 저널리즘을 사법부의 판단에 맡기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면 어쩔 수 없을 것입니다. 부디 그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아울러 정치권력으로부터 언론 자유가 암울했던 지난 시기 이른바 ‘객관성’ 규정을 이유로 얼마나 많은 방송프로그램과 제작자들이 탄압을 받았는지는 잘 알고 있으시리라 생각합니다. 역사는 이번 방심위 결정이 ‘우리 언론 치욕의 한 장면일지, 아니면 과거 정권들이 그랬던 것처럼 언론 탄압의 한 장면일지’ 기록할 것입니다. 재심에서 현명하고 올바른 결정을 다시 내려주실 것을 방심위에 간곡히 요청을 드립니다.

 

2020.02.26.

제작진 성재호, 김귀수, 하누리, 정새배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