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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3_정의기억연대가 사는 길(조혜경)

2020년 06월 3일

정의기억연대가 사는 길

 

조혜경 (정치경제연구소 대안 연구위원)

 

 

30년 역사의 정대협/정의연에 닥친 최초의 시련

 

우리나라 위안부 운동을 대표하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이하 정의연)이 한편에서는 위안부 피해 당사자인 이용수 할머니의 정의연 해체 요구가 제기되고, 다른 한편에서는 각종 부실 회계 의혹이 윤미향 전 정대협 대표이자 정의연 이사장에 대한 검찰 수사로 이어져 곤혹을 치르고 있다. 이용수 할머니의 폭로로 촉발된 위안부 운동의 독점 및 사유화 비판은 그동안 정의협/정의연이 추구해 온 위안부 운동의 목표와 방식을 정면으로 겨냥하고 있다. 덩달아 수면 위로 떠오른 회계 부정 의혹은 단체의 진정성과 신뢰를 근저에서 뒤흔들 만큼 심각한 사안이다. 정대협이 1990년 설립된 이래 30년 역사상 최초의 시련이자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윤미향 의원측과 정의연의 대응은 궁색한 변명과 앞뒤가 안 맞는 해명이 전부다. 이용수 할머니가 30년 위안부 투쟁의 동지였던 윤미향 의원과 정대협 방식의 위안부 운동에 쏟아낸 비난에 대해서는 개인적 감정 차원의 문제로 격하하거나 ‘고학력층, 중산층’ 출신의 인권운동 활동가와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가진 것도 없는 피해 당사자 사이에서 나타나기 마련인 흔한 갈등으로 치부하고 있으며, 부실 회계 처리는 사소한 실수라거나 ‘열악한 시민단체’의 일반적 관행으로 축소하고 있다.

 

자기성찰 없는 위기 극복은 불가능하다.

 

정대협/정의연과 두 조직을 대표했던 윤미향 개인에게 닥친 시련과 위기가 30년 위안부 운동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미향 의원과 정의연 측은 자신들을 향한 비판과 의혹 제기를 마치 위안부 운동의 역사와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사악한 세력의 모략과 준동으로 몰아가고 있다. ‘토착왜구’에 맞서 위안부 운동의 대의를 지켜야 한다는 정의로운 사명감에 충만하여 반일·친일 프레임으로 덧씌워진 진흙탕 싸움을 벌이고 있을 뿐, 정대협/정의연의 위안부 운동과 단체의 운영 방식에 대한 자기성찰적 되새김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정대협/정의연에 닥친 시련이 반일·극일 운동으로 승화하여 정대협/정의연 운동가들의 도덕적 무결점에 대한 자기 확신을 더욱 두텁게 만들고 있는 듯하다. 반일·극일 정서에 무임승차하는 해묵은 방식으로 정대협/정의연에 쓰나미처럼 일순간에 몰려온 도덕성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정대협/정의연이 풀어야 할 두 가지 숙제

 

먼저 형사적 처벌 대상인 국고보조금 및 기부금의 횡령과 배임, 그리고 사적 유용 의혹의 실체적 진실을 밝히는 일은 검찰의 손으로 넘어 갔고, 윤미향 의원의 거취 문제는 검찰 수사와 법정에서 가려질 것이다. 남은 문제는 두 가지다. 첫째는 정대협/정의연의 위안부 운동 독점과 사유화 논란이고, 둘째는 정의연측도 ‘작은 오류’라고 인정하고 있는 부실 회계 처리에 관한 것이다. 모든 의혹의 중심에 있는 윤미향 전 정의연 이사장이 지난 4월 말 조직을 떠났으니 이제 신임 이사장과 운영진이 나서서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해 단체의 입장을 밝히고 해결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 법적 책임 여부와 상관없이 윤미향 의원과 정대협/정의연이 도덕적·사회적 평판 위기를 넘어서기 위해, 그리고 위안부 운동의 대의를 지키고 30년 정대협 활동이 거둔 성과를 지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상처와 증오만을 가르치는위안부 반일 투쟁이 모든 외교적 해법을 가로 막다.

 

이용수 할머니와 정대협/정의연의 충돌은 ‘정대협/정의연 방식’의 피해자 중심주의에 내재한 배타적 독선에서 기인한다. 하나로 모아지지 않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모습과 목소리를 거대한 반일 투쟁의 깃발로 덮어버리고, 이용수 할머니의 말씀처럼 “상처와 증오만 가르치는” 피해자민족주의로 위안부 운동을 떠받쳐 왔다. 위안부 운동의 확산을 반일 투쟁의 확장으로 바라보는 순간 외교적 타협을 통한 위안부 문제의 해결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선택지가 된다. 실제로 정대협/정의연은 한일 양국 간 위안부 문제의 외교적 해결에 늘 반대 입장을 취해왔다. 1993년 고노 담화와 1995년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의 설립, 그보다 훨씬 진전된 2015년 12월 28일 한일 위안부 합의와 화해치유재단의 설립이 모두 정대협의 위안부 운동이 일구어낸 커다란 성과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눈높이를 점차 높여가며 외교적 타협안에 대해 수용 불가 입장을 고수해왔다. 외교적 해법의 출구가 막힌 상태에서 정대협/정의연의 입장만이 ‘진정한’ 해법이며 자신의 동의 없는 어떤 방식의 위안부 문제 해법도 용납할 수 없다는 배타적 독선이 위안부 운동 내부의 균열을 만들고 키워온 것이다.

 

정대협/정의연, 위안부 피해자 목소리의 독점적 창구일 수 없다.

 

피해 당사자와 정대협 사이의 오래된 내부 균열을 정대협은 그동안 쉬쉬해왔고 우리 사회 전체도 외면해왔다.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다양할 뿐만 아니라 피해자들과 이들을 대변하는 숭고한 운동의 활동가가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 모두에게 불편한 진실로 다가왔고, 반일 위안부 투쟁에서는 온 국민이 하나의 마음이어야 한다는 강박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용수 할머니의 폭로는 우리에게 불편한 진실을 직시하게 만들었다. 뒤늦은 각성의 배경에는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을 묻는 정의연의 위안부 반일 투쟁이 우리나라 법원으로 무대를 옮겨오면서 일본 정부가 아니라 우리 정부에게 공이 넘어 온 것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어쨌든 우리나라 위안부 운동의 지난 역사를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위안부 운동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양할 뿐만 아니라 피해자든 활동가든 절대적 성역은 없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위안부 문제의 외교적 해결과 대정부 협상에서 위안부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소통창구의 역할을 담당했던 정대협/정의연은 이제 위안부 운동의 독점과 사유화 논란이 제기한 기존의 접근방식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밝혀야 하고 앞으로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것인지를 제시해야 할 것이다. 위안부 운동을 피해자 보상을 넘어 더 큰 운동으로 끌어나가기 위해서 정대협/정의연이 반드시 풀어야하는 첫 번째 숙제다.

 

부실 회계 처리의 잘못은 위안부 운동의 대의로 덮어지지 않는다.

두 번째 숙제는 부실 회계를 바로잡는 일에 관한 것이다. 이 문제는 위안부 운동과는 직접 관련이 없는 시민사회단체의 재무적 투명성과 운영의 규범에 관한 것이다. 위안부 운동의 공과 과와는 무관한 문제이고, 공이 크다는 이유로 작은 과를 용서하자는 식으로 몰고가서는 안 된다. 정대협/정의연의 부실 회계 문제에는 정대협과 정의기억재단의 통합에 관한 부실한 행정 처리도 포함된다. 부실 회계와 관련해서는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의혹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다. 회계에 무지해서, 혹은 돈 관리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아서, 엉터리 회계 처리를 심각한 문제라고 인식하지 못해서, 아니면 그냥 관행이어서 등등 여러 가지 이유를 댈 수 있겠지만, 그 이유가 뭐가 됐든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이다. 게다가 정대협과 정의연의 가짜(?) 통합, ‘두 지붕 한 살림‘ 운영은 부실 회계 논란과 의혹을 두 배로 부풀리고 있다. 정의연 홈페이지의 단체소개에 따르면 1990년 발족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와 2016년 설립된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재단’이 2018년 7월 11일 통합하여 정의기억연대가 되었다고 한다. 두 단체의 통합은 정의연의 정관(2018년 2월 의사회 의결을 거쳐 같은 해 7월 주무관청 국가인권위원회로부터 정관변경 허가를 받음)에도 명시되어 있으며, 정의연 발족과 함께 정대협 홈페이지는 폐쇄되었다. 그런데 정대협은 2020년 6월 1일 현재 여전히 독자적인 법인으로 존속하고 있으며 정의연과 별개로 자체 사업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정의연 발족 이전과 다름없이 지정기부금단체의 지위를 유지하며 활동을 이어가고 있으나, 국세청 지정기부금단체 공개 자료에서만 그 정체가 확인될 뿐이다. 정대협 홈페이지는 폐쇄되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정대협을 계승했다는 정의연 홈페이지에서도 정대협에 관한 정보를 찾아볼 수 없다. 이는 명백한 지정기부금단체 의무 위반이다. 단체 통합의 부실한 사무 처리가 정대협을 ‘유령단체’로 만들고 최악의 경우 지정기부금단체 지위가 박탈될 수 있는 상황으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부실 회계 의혹을 해소하는 것은 정의연 지도부의 책무다.

 

첫 번째 숙제가 정치적으로도 험난한 과정을 예고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두 번째 숙제의 해법은 매우 간단하고 단순하다. 잘못을 솔직히 시인하고 망가진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면 된다. 그런데 이런 저런 변명으로 부실 회계 처리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현재의 이사회와 운영진이 내부 감시에 실패한 이유를 밝힐 수 있을지 의문이다. 더구나 부실 회계 처리가 형사적 처벌 대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버티기에 들어가 부실한 회계처리에서 파생된 횡령이나 배임, 탈세 등에 대한 검찰 수사 결과를 기다리겠다거나, 관련 정부 부처의 조사결과를 기다리겠다는 태도는 엉터리 자금 운영에 대한 국민적 실망과 불신을 정대협/정의연 스스로가 해소할 의지가 없다는 것으로 읽힌다. 심지어 5월 13일자 정의연의 기부금 사용 관련 ‘의혹’에 관한 설명 자료에서는 “매년 변호사와 공인회계사로부터 회계 감사를 받아왔으며 매번 문제가 없다는 의견을 받아왔습니다”라는 해명을 내놓음으로써 감사위원에게 모든 책임을 미루었다.

 

한 단계 더 성숙한 민주사회를 향해 시민단체의 자격요건을 갖추자.

 

엉터리 자금 운영과 부실한 회계 처리 자체가 형사 처벌대상이 아니라고 해서 지금까지 위안부 운동을 응원하고 후원해 온 기부자들에 대한 도의적 책임까지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부실 회계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정대협/정의연의 이사회와 운영진이 부실 회계와 내부 감시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한다. 새로 이사진을 구성하여 기부금 회계 처리에서 누락된 자금의 행방 등 끊임없이 제기되는 다양한 의혹에 대한 자체 조사를 진행하여 진상을 규명해야 하고 매년 회계감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왜 수많은 오류와 엉터리 회계 처리를 방치했는지도 밝혀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재발 방지를 위해 내부 규율을 어떻게 강화하고 어떻게 제대로 감시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 방안을 내놓아야 한다. 시민단체의 자율적 자정 능력이야 말로 정의연/윤미향 사태에 관해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강조한 “한 단계 더 성숙한 민주사회”가 요구하는 시민사회의 자격요건이기 때문이다.

 

숭고한 대의를 쫓는 진보운동 단체에서도 내부 감시와 철저한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활동가의 부정 비리는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유명한 국제적 시민단체나 비영리법인에서 심심치 않게 벌어지고 있는 일이기도 하다. 기부금과 정부 보조금, 자원봉사자들의 지원에 의존하는 시민사회단체에서 활동가의 부정과 비리는 단체의 존립을 위협하는 평판 위기로 번질 가능성이 높다. 시민사회단체는 부정과 비리에 대한 소문이나 의혹만으로도 파괴력이 큰 평판 위기에 내몰릴 수 있기 때문에 사법 처리 결과를 기다리는 여유가 용납되기 어렵다. 검찰 수사나 주무부처 조사 결과가 언제 나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정의연과 나눔의집 등 위안부 피해자 단체의 후원자들이 기부금 반환 소송을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활동가의 부정비리를 예방하기 위한 단체의 의지와 노력은 물론이고 완벽한 차단이 불가능한 개인적 일탈행위에 대한 단호한 대처가 단체와 그 단체가 지향하는 대의를 지키는 유일한 방법임을 정대협/정의연이 되돌아봐야 할 것이다.

 

원본 첨부 :

ED200603_송곳과프리즘_정의기억연대가_사는_길